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공작 (문단 편집) === 우가키 공작의 실패 ===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노에 수상은 중일전쟁의 종결을 위해 육군 내부의 화평파에게 기대를 걸고 1938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개각을 단행,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과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을 경질하고 6월 3일 신임 외무대신에 화평을 지지하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신임 육군대신에 중국통으로 알려진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임명했다. 육군 내부에선 우가키의 화평 노선을 불만스러워하였으나 고노에는 이를 무시했다. 고노에 수상은 5월 초순 "장 정권을 철저히 응징하고 파괴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결코 [[휴전]]하지 않는다. 비록 수년이 걸리더라도 제국의 결정 방침은 변경하지 않는다."면서도 수면 아래에서는 장제스와의 화평을 얻고자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는 취임에 앞서 4가지 조건을 제출하여 고노에의 완전한 동의를 얻었는데 우가키의 4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내각의 결속을 강화한다. 1. 대화 외교를 단일화한다. 1. 조속히 평화 방침을 결정한다. 1.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에 너무 구애 받지 않는다. --내가 먼저 연락 끊었지만 그렇다고 날 무시하진 말아줘-- 우가키는 6월 17일 첫 기자회견에서 "대국이 크게 달라진다면 일본으로서도 태도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면서 화해의 태도를 엿보였다. 일본의 태도 변화에 중국 측도 무력의 힘을 빌려 굴복시키려는 화의에는 굴복하지 않는다면서도 국방 최고회의 비서장 장췬의 개인 자격으로 우가키의 외상 취임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장췬과 우가키는 과거 우가키가 육상 시절에 [[교토]]에서 만나 아시아의 장래와 중일 양국 제휴의 중요성을 토론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장췬은 전보를 통해 중일 우호친선의 숙원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전달했다. 이에 우가키는 장군에게 회답을 보내 [[쿵샹시]]가 일본에 와서 서로 대화할 수 없겠냐고 제안했다. 이에 6월 26일과 28일에 거쳐 [[홍콩]]에서 쿵샹시의 비서 교보삼과 일본의 홍콩주재 총영사 나카무라가 회담했고 7월 18일에 회담이 다시 벌어졌다. 회의 결과 쿵샹시가 [[나가사키]]로 와서 일본과 직접 담판한다는 합의가 나왔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이러한 화평공작에 반발했다. 화평공작 자체에 난리치는 강경파도 있었으나 육군성 군무과장 가게사 사다아키 등이 주도하던 왕징웨이 공작과 이 우가키 공작이 충돌함에 따라 반발하고 나선 왕징웨이 지지파들도 반대파였다. 고노에 수상은 왕징웨이가 정치 행동의 진폭이 너무 심하다면서 왕징웨이 공작보단 우가키 공작 쪽에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왕징웨이 공작을 지지하던 육군상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이 반발했다. 이타가키는 왕징웨이 공작을 암시하며 8월 30일 다음과 같이 담화했다. >"대중정책은 여전히 1월 16일 발표된 고노에 성명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그러나 장제스가 만일 신정권에 참가한다면 재검토의 여지가 없지도 않다. 중국 신 중앙정부의 수립에 있어 [[몽강]] 자치위원회, 북경 임시정부 및 남경 유신정부가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부의 준비위원회를 조직, 곧 정부가 탄생되게 될 것이다." 우가키가 쿵샹시의 방일에 앞서 그간의 접촉 경과에 대해 내각에 보고하며 교섭의 전권을 요청하자 육군 내부의 우가키 반대 세력들이 결집하여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대지원 설치 문제였다. 대지원은 중국에 관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문제를 통일적으로 처리하는 중앙기관으로 일본정부가 새로이 설치하려 했는데 이를 추진한 것은 대중외교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던 육군이었다. 우가키는 외무성의 권한을 침해하는 이러한 조직의 설치를 반대, 대지원의 권한을 일본군 점령지역에 한한다는 수정안으로 저항했으나 고노에가 군부에 동조하자 열받은 우가키는 결국 9월 29일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10월 1일 각의는 대지원 설치를 정식으로 결정, 12월 26일 흥아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식으로 발족했다. 때맞춰 국민정부도 일본 육군 강경파들이 압력을 통해 추가해놓은 일본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면서 쿵샹시의 방일을 취소하였다. 고노에는 이 때문에 이게 다 육군 강경파 때문이다!를 외치게 되었으나 이런 개판이 된 상황을 제어하지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